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귀농을 시작했을 때였어요. 어느 날, 저희 집 지붕 위에 이끼가 자라고 있는 걸 봤습니다. 쨍쨍한 햇볕 아래에서도 조용하지만 강하게 살아가고 있더군요. 저에겐 그게 작지만 강렬한 충격이었습니다.”
-박재홍 코드오브네이처 대표
지붕 위 지붕빨간이끼의 모습
이끼는 언제나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만 자라는 줄로만 알았습니다. 그런데 한낮의 열기 속에서도 그 작은 생명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.
"내가 알고 있던 자연의 상식은, 어쩌면 한쪽뿐이었을지도 모른다."
그날 이후, COFN은 이 작은 식물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. 늘 스쳐 지나가던 존재였지만, 어쩌면 회복의 시작은 이처럼 작고 강인한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. 이끼는 그렇게 COFN에게 생태 회복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.
선태식물과 관다발식물의 구조 비교
이끼를 새롭게 보기 시작한 우리는 곧 놀라운 사실과 마주했습니다. 이끼는 지구 최초로 육지에 등장한 식물이라는 점입니다. 지구 역사의 시작을 생각할 때 보통 쥐라기, 백악기와 같은 시대를 떠올리지만, 그보다 더 이전 시기가 있습니다. 바로 ‘선캄브리아기’입니다. 그 시절에는 자연이라는 개념조차 무의미했을 정도였습니다. 숲도, 풀도, 토양도 없었죠.
이 시기, 지구에서 가장 먼저 육지를 밟은 생명이 있었습니다. 바로 ‘선태식물’이라 불리는 식물군으로, 오늘날 이끼류의 조상입니다. 선태식물은 뿌리도, 관다발도 없었지만 육상 환경에 가장 먼저 적응했고,생태계의 첫 출발을 가능하게 만든 존재였습니다. 이끼는 단지 오래된 식물이 아니라, 지구 생태계를 여는 열쇠였던 셈입니다.
이끼는 보통 1~10cm 크기로 작지만, 그 안에는 수억 년을 버텨낸 생존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. 이끼는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며, 흡수한 수분만으로 광합성과 대사 작용을 이어갑니다. 흙이 없는 곳에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. 이끼는 보통 서늘하고 그늘진 환경에서 잘 자라지만, 그보다 훨씬 더 극한의 조건에서도 생존할 수 있습니다. 이런 생존력의 핵심에는 탈수 내성*이라는 생리 메커니즘이 있습니다. 이 메커니즘 덕분에 이끼는 남극의 얼음 밑,사막의 바위 틈, 심지어 우주 실험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.
* 탈수 내성 : 이끼는 수분이 부족해지면 대사 활동을 멈추고 휴면 상태에 들어가며, 물이 다시 공급되면 빠르게 광합성과 생장을 재개합니다.
이끼는 흙이 없는 맨땅, 시멘트 균열, 바위 틈 같은 극한 환경에서도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식물입니다.
이러한 정착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, 생태계 복원의 출발점이 됩니다. 이끼는 바위나 콘크리트 위에 유기산*을 분비해 표면을 서서히 풍화시키고, 자신이 유기물로 분해되며 부엽토*를 형성합니다. 이 과정은 미생물과 균류가 뿌리내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,더 많은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의 기초가 됩니다.
또한, 이끼는 체중의 약 5배에 달하는 수분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. 이 수분은 주변의 습도를 조절하고, 토양의 유실을 방지하며 환경을 안정화시킵니다. 더 나아가, 이끼는 지구 대기 환경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. 영국 엑서터 대학교 팀 렌턴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, 수억 년 전 이끼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지구 전체 산소 농도가 약 30% 가까이 증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. 당시 초기 이끼류는 바위를 풍화시키는 과정에서 인산염*과 같은 영양염을 바다로 흘려보냈고, 이는 해양 플랑크톤의 생산성을 높이고, 유기탄소의 저장량을 증가시켰습니다. 결과적으로는 이 과정이 대기 중 산소 농도를 현대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 영향을 주었죠.
이끼는 비록 작고 눈에 띄지 않지만, 토양 형성, 수분 유지, 대기 변화에 기여하며 생태계 회복의 핵심 토대를 만들어왔습니다.
* 유기산 (organic acid) : 탄소를 포함한 유기 화합물 중 산성을 띠는 물질
* 부엽토 : 낙엽이나 죽은 식물체 등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만들어진 유기물이 풍부한 흙
* 인산염 : 해양 생태계에서 플랑크톤 성장에 필요한 주요 영양소
현미경으로 본 이끼 원사체 (Protonema)
이제 그 답은 분명해졌습니다. 이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기반을 만들고, 그 위에서 다른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돕습니다. COFN은 이끼의 이러한 특성에서 영감을 받아, 생태계 회복을 위한 기반을 설계합니다.
그래서 우리는 이끼를 선택했습니다.
우리는 자연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듭니다. 복원은 단순히 초록을 되돌리는 일이 아닙니다.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기준, 측정 가능한 변화가 필요합니다. 그래서 우리는 '복원을 설득력 있게 수치화하는 일'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. COFN이 말하는 회복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닌, 데이터로 증명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.
오늘도 우리는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 기반 해법(Nature-based Solution)을 설계해 나가고 있습니다. COFN은 생명이 떠난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.
회복의 시작은 늘 작고 조용하지만, 그 끝에는 반드시 새로운 희망이 움틉니다.